호치민 시 근교 가봐야할 곳

구찌 터널

구찌 터널은 1940년대 후반 무렵에 시작하여 25년간 구축되었다. 사실, 이곳의 지하 터널들은 빈약한 장비를 갖춘 농민군이 적군의 첨단 무기, 헬기, 대포, 폭격기 및 화학 무기에 대응하기 위해 마련한 생존 방편이었다. 대프랑스 전쟁 중에 베트민이 최초로 구찌의 단단하고 붉은 땅에 방공호와 터널을 구축하였다. 이때의 땅굴은 주로 마을간 연락과 프랑스군의 토벌 작전을 피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다. 베트콩의 민족해방전선 활동이 1960년경부터 본격화되면서 기존의 베트민 터널을 보수하고 새로운 확장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불과 몇년 새에 터널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고, 구찌 현과 인근 지역 대부분은 베트콩의 확고한 통제권에 편입되었다. 또한 구찌는 사이공으로 정보 요원 및 파괴 공작원을 침투시키기 위한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1968년 구정공세 기간 동안 남베트남 수도에 퍼부어진 엄청난 공격들은 바로 이곳에서 계획, 실행 되었다.  

구찌 현 내의 터널만 해도 총 길이가 250km 이상이었고, 곳에 따라 몇 층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러한 터널 덕분에 남베트남과 미군의 지상 및 공중 작전으로 인해 서로 고립되어 있던 베트콩 요새들간의 상호 통신이 가능했다. 또한 터널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심지어 동주 미군기지 영내까지도 기습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런 후, 베트콩들은 은폐된 뚜껑 문을 통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터널에 대한 지상 작전이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실패를 거듭함에 따라, 미군은 대규모 화력을 동원했고, 결국 420평방키로미터 넓이의 구찌는 '포격, 폭격, 가스 및 고엽제 살포가 가장 많이 집중되어 전쟁 기간 중 완전히 초토화된 지역으로 남았다.

터널에서 싸운 베트콩 게릴라들은 극히 어려운 조건에서 생활했고,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었다. 터널에서 싸운 16,000명의 요원들 중 6,000명 정도만이 살아 남았다. 더불어 이 지역 양민 수천명이 사망했다. 폭격, 몇 주, 몇 달씩 지하에서 생활하면서 느끼는 스트레스, 수많은 친지와 동지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그들의 끈기는 실로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그 후 구찌 마을들은 정부로부터 수많은 영예로운 포상, 훈장, 표창을 받았고, 많은 마을이 '영웅적 마을'로 선포되었다. 전쟁 후 이 지역 인구는 많이 증가 하였으나 아직 고엽제가 토양과 물에 남아 있어 농산물 소출은 여전히 적다.

까오 다이교

까오다이교는 푸꿕섬의 현령으로 일했던 관리이자 신비주의자 응오민찌에우(1878년 출생)가 창시한 종교이다. 동서양의 종교 서적을 두루 섭렵한 응오민은 스스로 강령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의 활약 덕분에 그곳의  영적교류가 크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1926년에 행해진 의식에서 시작되어 비로서 정식 종교로 창시되었다. 초기 신자들 중에 상당수는 프랑스 식민 정부에서 근무하는 베트남인들이었다. 1950년대 중반, 남부 베트남에서 8명중 1명이 까오다이 신자였으며, 떠이닌 성에서 사실상 독립적인 봉건 정부를 세웠고 뒤이은 20녀년간 이 지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까오다이교는 1926년에서 1956년까지 남베트남에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때 일본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25,000명의 까오다이군 대부분이 남베트남군에 통합되었다. 프랑스-베트민 전쟁 중에 까오다이 군수 공장은 자동차 연통으로 박격포를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사이공 정부도 이 까오다이 신자들을 겨우 참아주고 있었지만, 이들은 베트남전 중에 베트콩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에 통일이후 가장 두려운 나날을 보냈다. 실제로 까오다이 소유의 모든 토지는 새로이 들어선 공산 정권이 압수했고 1979년에는 신도 네 명이 처형됐다. 하지만 1985년에는 총본산과 400여 곳의 사원이 까오다이 교단에 반환되었다. 까오다이의 교세는 떠이닌 성과 메콩강 삼각주에서 가장 강하지만, 남부와 중부 베트남 곳곳에서 까오다이 사원을 볼 수 있다. 현재 약 3백만명 이상의 신자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메콩 삼각주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떠이닌 성의 성도인 떠이닌 시에는 베트남에서 가장 흥미로운 토착 종교인 까오다이교의 본부가 있다. 이 종교의 총 본산인 까오다이 대사원은 아시아를 통틀어 다장 인산적인 건물 중 하나이다. 1933년부터 1955년까지 지어진 이 사원은 프랑스 성당, 중국 사원, 홍콩의 타이거 밤 가든과 마담 투소의 밀랍인형관 등 서로 모순되는 건축적 특색들을 합쳐놓은 로코코풍의 휘황찬란한 건물이다.

까오다이교는 동서양의 세속적, 종교적 철학들을 융합하여 이상적인 종교를 만들고자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 결과, 20세기 초 베트남에 알려져 있던 재부분의 종교 철학(불교, 유교, 도교, 베트남 토속 정련신앙, 기독교, 이슬람교)의 요소들이 조금씩 가미된 복합 종교가 되었다.

건물 외부와 내부에는 신기하고 흥미로운 여러가지 벽화와 조각물이 많다. 그 중에 제단 근처 상단에는 까오다이교의 중요한 인물들의 초상이 있다.

                         메콩 삼각주

팬케익 처럼 평평하지만 우거진 녹음이 너무나 아름다운 메콩 삼각주는 베트남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메콩강이 실어온 침전물로 형성된 땅으로, 오늘날까지 침전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이곳은 비옥하기로 유명하여 거의 절반이 경작지이고 세계 쌀 주생산지 중에 한 곳이다. 메콩 강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강의 하나이며, 이곳 삼각주 역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한다. 메콩 강은 저 높은 티벳에서 발원하여 남중국해로 흘러간다. 이어지는 4,500km의 여정동안, 중국을 지나고 미얀마와 라오스 국경 사이를 지나다가 라오스를 통과하고, 다시 라오스와 태국 국경을 따라 흘러들어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통과한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메콩 강은 두 개의 강줄기로 갈라진다. 하나는 쩌우독, 롱쑤언,껀터를 지나 바다로 흐르는 허우쟝(아래쪽 강)이고, 다른 하나는 빈롱에서 여러 지류로 갈라진뒤 5개 지점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띠엔쟝(위쪽 강) 이다. 메콩 강을 베트남어로 송끄우롱(구룡강)이라 부르는 이유는 강줄기가 여러개로 갈라진 데서 유래한다.

달콤하고 진한 쵸코렛을 녹인 듯 유유히 흐르는 이 지역의 근대사를 알아보자. 메콩 삼각주는 한때 크메르 왕국의 일부였으며, 현재의 베트남 영토 중에서 가장 최근에 합병된 지역이다. 18세기까지 이곳이 자신들의 땅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캄보디아인들은 아직도 이 삼각주를 '남부 캄보디아'라고 부른다. 크메르 루즈는 이 지역의 소유권 주장을 구실로 베트남 마을을 습격하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은 또한 베트남이 1979년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즈를 축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메콩 강 삼각주 보트를 타고 운하와 강을 여행한다. 주요 관광지로 미토, 벤쩨, 빈롱, 껀터를 들 수 있다. 그 중에 빈롱 인근의 까이베 수상 시장과 껀터 주변의 까이랑, 퐁디엔 수상 시장은 아침 일찍 북적대고 활기찬 모습이 장관이다.

도매상들이 큰 배에 각기 과일이나 채소를 한가지, 또는 몇 가지씩 전문적으로 판다. 손님들은 작은 배를 타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장을 본다. 도매상들이 긴 나무 막대 위에 자신들이 파는 물건의 샘플을 걸어 놓기 때문에 사고 싶은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큰 배로 메콩 강을 항해할 수도 있지만, 미토에서 작은 배로 작은 운하들이 만들어 놓은 미로를 지나면서 평화로운 농가를 구경해보자.